2014년 1월 23일에 작성한 텀블러 포스트이다.


  • 제목: 학문의 즐거움
  • 원제: 学問の発見
  • 저자: 広中平祐 (ひろなか へいすけ)
  • 역자: 방승양
  • 출판: 김영사

처음엔 원래 유치하다 (p.90~1)

'발명광'이라고 불리는 프랭클린(B. Franklin)은, 번개가 칠 때 연을 날리는 실험을 함으로 번개가 전기임을 증명하여 피뢰침을 발명한 것으로 유명하다. 어느 날 그는 또 하나의 발명을 하여 친구 집에 뛰어가 자랑스럽게 그것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계속되는 그의 발명에 약간 싫증이 난 친구는 "도대체 그렇게 유치한 것을 만드는 게 뭐가 대단하며, 무슨 소용이 있나?"라고 말했다. 그러자 프랭클린은 옆에 누워있던 갓난아이를 가리키며 이렇게 반문하였다. "그렇다면 이 아기는 무슨 쓸 데가 있는가?"

프랭클린의 이 말은 중요한 것을 시사하고 있다. 창조라는 것은 출발점에서는 모두 유치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창조의 원형은 아기와 같고 그것이 충분히 성장해야만 비로소 이용 가치가 밝혀지는 것이다. 프랭클린은 창조의 과정이 아기를 키워 가는 것과 다름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이 있기에 비로소 삶이 존재한다 (p.227~8)

"서양 문명의 몰락은 죽은 사람을 장식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시작했다." 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그는 큰 절의 스님이면서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친다. 이 말은 아이들에게 부모나 조부모의 임종을 보여 주지 않고, 꽃으로 장식한 관(棺)에 유해를 담은 후에 비로소 보여 주는 습관이 생기고 나서부터 서양 문명이 계속 쇠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가족의 죽음에 직면한다는 것은 확실히 아이들에게는 일시적으로나마 대단한 충격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은 그것이 인간의 욕망을 자각하는 데 큰 힘이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전쟁 중 학도 동원으로 야마구치(山口) 현 히카리 시에 있는 해군 공창의 탄환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했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거기서 공습을 맞았을 때를 대비한 훈련을 가끔 받았는데, 동급생인 친구와 나는 뛰기 싫어서 늘 숨어서 훈련을 안 받고 게으름을 피웠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진짜 공습을 받았다. 굉장한 폭음이 들리면서 소나기 같은 폭탄이 쏟아졌다. 평소 훈련을 안 받고 놀던 우리는 "도망쳐라!" 하는 말을 듣지도 않았는데 필사적으로 방공호를 향해 뛰었다. 나는 뛰는 도중 수많은 시체를 뛰어넘었다. 본능적으로 얼른 머리를 숨겼을 그들 시체 대부분은 엉덩이에 폭탄을 맞아서 비참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죽음이 없으면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삶이 존재한다. 그 철학자가 말했듯이 장식된 관만을 보게 되는 서양의 아이들은 확실히 삶과 그 뒷면에 존재하는 죽음을 모르기 때문에 삶의 가치를 인식할 기회를 빼앗겼다고 말할 수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대단한 것이다. 그 값진 삶을 보다 멋지게 사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의 특권이다. 그 특권을 포기하는 것은 어떤 뜻에서는 죽은 사람에 대한 모독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