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3일에 작성한 텀블러 포스트이다.
- 제목: 학문의 즐거움
- 원제: 学問の発見
- 저자: 広中平祐 (ひろなか へいすけ)
- 역자: 방승양
- 출판: 김영사
LONEliNESS (p.81~2)
지금까지의 인생을 돌이켜보면, 어떤 경우에도 마음이 맞는다든가, 의기투합할 수 있다든가 하는 것으로 친구를 선택하는 기준을 삼지 않았던 것 같다. 나에게 없는 것을 갖고 있는 친구, 무엇인가 배울 수 있는 친구를 의식적으로 선택하여 사귀어 왔다. 그 때문에 아주 친해지더라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내 안에 있는 작은 세계에 친구가 들어오려고 할 때에는 단호히 배격하려고 노력해 왔다.
이러한 교우 방법을 냉정하고 계산적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나는 이것을 지켜 왔기 때문에 남에게서 한 번도 배반당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잘난 척하는 것 같아 약간 쑥스럽지만 내 사전에 '배반당한다' 라는 말은 없다. 왜냐하면 나는 누구하고도 친근하게 지내고 때로는 속마음까지 털어놓고 개방적으로 대하기도 하지만, 나의 제일 중요한 주체성까지 영향을 받음으로써 나중에 후회하게 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즉 아무리 친하고 존경하는 친구더라도 그 친구에게 홀딱 빠져서 나 자신을 잃어버렸던 경험은 한번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친구 사이에 항상 어느 정도의 경계선을 긋고 그 경계를 넘지 않는 범위에서 사귀는 나의 교우 방법이 옳은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친구라고 하는 한 인간에게 배우고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는 내 방식이 효과적이었다고생각한다. 영어에 loneness(고독)와 loneliness(외로움)라는 단어가 있다. 이 두 단어의 뜻은 상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명확히 서로 대립하는 것이다. loneliness는 loneness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인간의 감정을 나타낸 말이다. loneness를 잃었기 때문에 loneliness가 생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loneness를 확고히 갖고 있으면, 좋아하는 사람이나 싫어하는 사람, 어떤 삶과 어떻게 접하더라도 loneliness를 느끼지 않는다는것이 나의 신조이다.
편견에서 벗어나 친구들이 가진 중요한 것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배우기 위해서도 자기 자신의 loneness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대가 안돼서 단념했어요~♪♪♪ (p.98~100)
그러나 경쟁의식이 이와 같이 좋은 결과를 나타내는 경우는 비교적 적다. 대부분의 경우 좋지 않은 결과를 만드는 것이 보통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갖고 있는 정신 에너지 중 창조에 쓰이는 부분의 비율이 경쟁의식으로 인해 질투로 변형됨으로써 상당히 낮아지기 때문이다. 정신 에너지는 사고 에너지, 창조 에너지 등을 포함한 에너지인데, 그것이 남과의 우열경쟁에 소모된다면 그만큼 창조 에너지가 적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다른 사람과 경쟁함으보써 자기가 도달하려는 목표의 초점이 흐려지고 결국에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게 된다.
경쟁의식은 결과적으로 볼 때 '좋은 경쟁의식'과 '나쁜 경쟁의식'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경쟁의식이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진 사례를 검토해 보면, 첫째로 경쟁자를 존경하기보다는 경멸하는 경향이 있고, 둘째로 그 사람 안에 경쟁자를 밀어뜨리려는 의식이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즉 경쟁자를 질투하고 있는 것이다. 질투심 때문에 정신 에너지가 마멸되고 판단력이 흐려지며 결과적으로 자기가 겨냥하는 목표의 초점을 잃어비리게 된다.
심리학자는 질투는 인간 특유의 감정이며, 모든 사람에게 존재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학문의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우리는 자칫 선망의 마음을 넘어서 남을 질투하는 경향이 있다.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그 이상한 감정에 대하여 더 이상 설명하지 못하지만, 어쨌든 질투는 무언가를 창조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정말 좋지 않은 감정이라고 단언해 두고 싶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은가? 여기서 체념하는 것이 필요해진다.
상대가 안돼서 단념했어요. 그래도 그리워 못 잊을그 사람.
이것은 전쟁 전에 유행한 '비에 피는 꽃' 이라는 노래의 가사인데 유학생활 동안 나는 가끔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이 세상에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우수한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하버드 대학 시절의 멈퍼드와 아틴이 그랬다. 그런 우수한 사람 들을 일일이 질투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 문제를 푸는 데 있어서 그러한 영재들에게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하거나, 그들이 나와는 상대가 안 될 정도의 재능을 보였을 때 나는 혼자 이 노래를 부르면서 체념하곤 했다. 체념한다고 해서 모두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면 질투심이 안 생긴다. 그리고 남을 질투하는 마음이 없으면 자기의 정신 에너지가 조금도 소모되는 일이 없고 판단력도 둔해지지 않는다. 결국 그것이 창조로 이어져 갈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체념하는 기술을 알아두는 것, 그것은 창조하는 데 관련되는 정신 에너지를 제어하고 증폭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이다.
"난 바보니까요." (p.102~3)
수학을 공부하다 보면 문제의 90퍼센트를 해결하고도 나머지 10퍼센트를 못 풀어서 막히는 경우가 자주 있다. 이것은 자칫하면 수학자를 신경쇠약에 걸리게 만드는 위험한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10퍼센트 때문에 전체를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물러서지 않고 끈기있게 승부를 걸 필요가 있다.
이런 경우에 부딪칠 때마다 그 아이의 명언을 소리내어 말해 본다. "난 바보니까요." 그러면 머리가 한결 가벼워진다. 눈앞이 밝아지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어차피 나는 바보니까 못하는 것은 당연하고, 할 수 있으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바보다'라고 자기 자신을 바로잡음으로써 경직된 상태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1
물론 이렇게 자세를 바로잡아도 나머지 10퍼센트를 도저히 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바로 앉음으로써 사고의 에너지가 되살아나고 이제껏 경직되었던 발상이 새로워지면서 10퍼센트가 쉽게 풀린 경험도 있다.
"상대가 안돼서 포기했어요."하고 포기하고, "난 바보니까요."하고 바로 앉아 보는 자세는 학문을 떠난 일상생활 속에서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체념의 기술이나 바로 앉는 지혜는 큰 실수를 범한 충격에서 다시 일어서게 하는 데에도 효과적이다.
素心深考 (p.106~8)
나는 이때의 실패로 창조하는 데 있어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배웠다.
그 전화를 받던 날 밤. 한잠도 못 잔 나는 다음날 불면과 충격으로 무거워진 채 보스턴 교외에 있는 독립전쟁의 유서 깊은 콩코드라는 동네의 코르도바 박물관에 갔다. 사람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가서 혼자가 되고 싶어서였다.
그 박물관에 있는 나무 밑에 앉아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여러가지 사색을 했다. 시간이 호르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만일 그때의 내 모습을 누가 보았다면 날개가 부러진 겨울 까마귀처럼 보였을 것이다. 헛되게 보낸 2년이란 세월의 무게가 양 어깨를 짓눌러서 나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 2년 동안에 다른 수학자들은 얼마나 충실히 일을 해놓았을까라고 생각하니 허무하기도 했다.
인형처럼 멍하게 앉아 있는 동안 나는 왜 2년간의 피나는 노력이 열매를 맺지 못했는지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바이어슈트라스의 정리' 는 1백 년 전부터 있었다. 나는 전에 그 정리를 써서 성공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왜 이 정리를 쓰면 된다는 생각을못했을까?
생각나는 일이 있다. 하버드 대학 세미나에서 연구 결과를 발표했을 때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의 교수로부터 "아름답다!"라고 칭찬받은 적이 있다. 그것 때문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그후 나의 방법을 고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고집은 편견을 만들고, 그 편견을 다시 고집하는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사이에 결국 일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는 태도를 잊어버리고, 무의식중에 일방적인 편견으로 가득 차 "이 방법으로 못 풀면 현대 수학으로서는 풀 수없을 것이다."라는 엄청난 독선이 내 마음속에 형성되어 갔던 것이다.
나는 2년에 걸쳐서 이 편견을 향하여 돌진했던 것이다. 그것은 오직 비뚤어지고 문제를 더 복잡하게 했으며, 미로에 들어가 헤매기 위한 시간이었다고도 말할수 있다.
사람은 성공을 경험함으로써 자칫하면 소박한 마음을 잃어버리기 쉽다. 내가 실패한 것은 그 때문이다. 문제에 대하여 솔직하고 소박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다면 원점으로 되돌아가서 나의 방법을 자세히 점검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전에 나 자신이 써서 효과가 있었던 '바이어슈트라스의 정리'가 관건이 된다는 것을 그다지 어렵지 않게 알았을 것이다. 소박한 마음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창조의 기반이 아닐까? 이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는 어느새 황혼이 가까워 있었고, 나는 어느 정도 힘을 되찾았다.
나는 사람들이 사인을 원할 때 '소심심고(素心深考)'라고 쓴다. 이렇게 쓰는 까닭은 "소박한 마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깊이 생각하라."라고 나 자신에게 항상 타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도 그때 상황이 강렬히 나의 의식 속에 남아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일 게다.
사람이 계속 배워 나가기 위해서는 작은 것이라도 '성공 경험'을 많이 쌓아 올릴 필요가 있다. 이것은 창조의 단계에 들어가서도 적용된다. 작은 것을 만드는 데 성공함으로써 기분이 좋아지고, 그 쾌감이 다음의 보다 큰 창조를 불러오는 일이 자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이 우수한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성공 경험만을 쌓아서는 안 된다. 때로는 성공에 필요한 만큼 노력을 했는데도 실패하는 경험을 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창조의 본질도 창조의 구체적인 방법도, 또 그 바탕이 되는 핵심도 천재가 아닌 우리로서는 실패를 통하여 몸소 터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패를 통하여 터득한 노하우를 가지고, 보다 좋은 창조에 도전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을 사실로서 (p.110~4)
우선 무엇이 '사실'(事實)이며 무엇이 '억측'인지를 분명히 분간하여 사실은 사실로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2
'사실'이라는 것은, 예를 들어 거꾸로 보나 옆으로 보나 바뀔 수 없는, 그리고 움직일 수 없는 엄숙한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사실을 사실로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말처럼 간단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 중략 ⋯⋯
전에 말했듯이 사람의 두뇌는 컴퓨터나 로봇과 달리 관용성을 갖고 있다. 이 특징 때문에 '지혜'라는 것이 생기지만, 거꾸로 이 관용성 때문에 생각지도 않았던 과오를 범하고 사실을 잘못 인식할 때가 있다.
⋯⋯ 중략 ⋯⋯
이와 같이 희망적 관측이나 선입관, 쓸데없는 걱정은 사실과 억측의 차이를 분간하지 못하게 하여, 사실도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데 그 기본적인 오류가 있다. 바꾸어 말하면, 사실을 사실로서 그대로 정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과 상상의 경계를 분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3
말은 이렇게 간단하지만 사실을 사실로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늘 나 자신에게 타이르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가는 데 있어서나 학문하는 데 있어서 생각하지도 않았던 과오를 범하기 쉽기 때문이다. 어디까지가 사실이며 어디까지가 희망적 관측 또는 억측인지를 확실히 인식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수학은 어디까지나 철학이 아니다 (p.128~131)
요컨대 오카 선생님은 수학을 하기 위해서는 기술을 초월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실제로 선생님은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을 절에 데리고 가, 좌선(坐禪)을 시킨다든가 도겐(道元: 일본의 명승)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읽게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기술을 초월하지 않으면 수학을 못한다는 것을 그런 방법으로 가르치신 것이다.
⋯⋯ 중략 ⋯⋯
그러나 기술을 초월하라는 말은 이미 기술을 습득한 사람에게나 할 수 있는 것이지, 아직 초월할 만큼 기술을 터득하지 못한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 중략 ⋯⋯
이런 이유로 나는 오카 선생님의 강의를 듣는 것을 중단했다. 선생님의 말씀에 말려 들어갈 위험을 피한 것이다. 고매한 선생님의 강의를 듣는 것보다 수학의 기술적인 책을 읽는 편이 당시의 나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타이르면서 가우스의 《수론》을 숙독했던 것을 기억한다.
사람은 잊어버리는 능력을 가진 동물이다. 자기 체험을 정말 잘 잊어버린다. 마찬가지로 고생해서 배운 학문의 기술 체험도 한발 한발 올라갈 때마다 잊어버리게끔 되어 있다. 계단을 모두 올라가서 기술을 초월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맨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 "나한테로 뛰어 올라오시오."라고 하면 말이 안 된다. 그 사람이 설사 뛰어 올라오려고 해도 미끄러져서 도로 떨어질 것이 뻔하다.
지금에 와서야 나는 비로소 수학에는 철학적인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수학 또한 그 출발점에서는, 사람이 생각하는 학문이 모두 그렇듯이 그 배경에 항상 애매모호한 철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철학이 없으면 좋은 수학은 탄생하지 않는다. 당시 오카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을 나는 이제야 어느 정도 이해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수학은 어디까지나 철학이 아니다. 수학이 철학적인 측면에서 공헌하더라도 그것을 수학의 업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수학에는 명확하게 기술적인 측면이 있다. 또한 수학만의 독특한 기술이 존재한다. 철학이 없어서는 안 되지만, 그 철학이 지상에 돌아와서 수학적인 기술 속에서 구축되지 않으면 수학의 업적이 되지 못한다. 나는 그러한 뜻에서 수학은 기술을 초월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 저자가 가르쳤던 학생 [본문으로]
- 인지·정서·행동치료(Rational Emotive Behavior Therapy)와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본문으로]
- 수학 문제를 풀려고 할 때 답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기보다 처음부터 답이 있다고 전제하는 경우 [본문으로]